독립협회
창립
배경 |
아관파천 이후 친미•친러 내각 수립 |
과정 |
미국에서 서재필 귀국 |
활동
자주국권운동 |
• 독립문 건립 : 왕실, 관료, 학생 등이 기금 마련 |
자유민권운동 |
•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 요구 |
자강개혁운동 |
• 정부 대신의 부정부패 규탄 상소 운동 |
의의와 한계
의의 |
• 자유민권 신장과 국권수호에 기여 |
한계 |
• 외세 배척의 이중적 태도 : 러시아 견제에 적극적, 미국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호적 |
국채 보상 운동
• 대구에서 국채 보상 의연금을 모집하는 일에 대하여 연설회를 열었는데, 일반 인민이 각기 의무로 몇십원 몇십전씩 기부하는데 김창녕 씨가 20원을 내고, 걸인이 얼마를 내면서 즉시 담뱃대를 없애고 돌아갔으며, 부녀자들은 반지와 은장도까지 납부하였더라. - 황성신문, 1907.3.1 |
• 오늘 우리의 국채가 1,300만 원에 달하였는데, 이 국채를 만일 부패한 정부에만 맡겨 두고 우리 국민이 보상할 방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마침내 빚의 종을 면치 못할지라. …… 우리 해외에 있는 동포도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당연하기 에 본원 등이 이에 발기하오니 미주에 있는 모든 동포는 각각 힘을 다하여 보조하기를 바라옵고 또 돈을 받는 곳은 공립신보사로 정하였사오니 이를 헤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광무 11년(1907) 3월 25일 샌프란시스코 공립 협회 회원 김성무, 임치정, 이교담 삼가 아룀. - 국채 보상 의연 발기문 - |
일제의 계속된 차관 제공으로 1907년 대한 제국의 국채는 정부의 1년 예산에 맞먹는 1,300만 원에 이르렀다. 이에 국민의 성금으로 국채를 갚고 국권을 지키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은 각종 계몽 단체와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 기관이 적극 후원하는 가운데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해외 동포들까지 참여하였다. 남자들은 금연으로 돈을 모으고, 부녀자들은 반지와 비녀를 모아 성금으로 냈다. 일본 유학생과 연해주의 동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으며, 일부 외국인까지 참여하였다. 특히 두 번째 자료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 단체인 공립 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에 실린 광고 기사로 해외 동포들의 호응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심화학습: 독립 협회의 창립과 해산
(가) 서울의 신사(紳士)들이 독립 협회를 설립하였다. 이에 앞서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와 중추원 고문관에 임명되어 서울에 머물렀다. 이때 이르러 신사 안경수, 이완용 등 30여 명과 함께 독립 협회를 설립하였다. 그 규칙에, “독립문 및 독립 공원을 건설하는 사무를 관장한다. 그 구성원으로는 회장•위원장•위원 등의 직책을 두되, 회원은 정해진 수 가 없다.”고 하였다. 안경수가 회장, 이완용이 위원장이 되었다. |
(나) 황제가 지시하였다. “지난날 독립 협회에 관한 단속 한계에 대해 타이른 것은 부드럽고 정중했을 뿐만이 아니었다. 지혜를 발달시키고 문명 개화와 진보를 이룩하도록 했으며 회의 순서를 정하고 규정을 따르도록 했다. 이는 진실로 깨우쳐 인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발길을 돌리지 않고 패거리를 불러 모아서는 명성과 위세를 더욱 부리고 명령에 맞서서는 한층 제멋대로 업신여기면서 조정을 꾸짖고 대신을 쫓아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끝내는 바로 폐단을 수습한다고 빙자하며, 네 거리에 나무 울타리를 치고 민중들을 지휘해 움직여서, 고위 관리를 억지로 위협해 결재하라고 다그쳤다. 그리하여 난리의 싹과 재앙의 기미가 눈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가 막힌다. 이 일은 대수롭지 않게 처단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협회라고 이름하는 것은 모조리 혁파한다.” |
아관 파천 시기에 서재필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개혁적 관료 및 지식인들과 함께 (가)와 같이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권 수호 운동과 민권 운동, 그리고 개혁 운동에 치중하였다. 특히, 만민공동회의 개최와 관민공동회에서의 헌의 6조 채택, 그리고 의회식 중추원 관제 반포를 통해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이 독립 협회가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고 모함하자 고종은 (나)와 같이 독립협회의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에 반발한 만민공동회의 시위가 계속되자,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